제목[토요단상] 처벌주의와 장려주의2019-08-02 09:2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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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로 하여금 어떤 행동을 하게 하거나 못하게 할 때, 부모는 요구하는 행동을 주문하고 이를 준수하도록 부대조건을 제시한다. “저러저러한 행동을 해라. 그렇지 않으면 이러이러한 처벌을 받을 것이다.” 부모로부터 이런 요구와 명령을 받은 자녀는 그 행동이 주는 이점보다 준수하지 못했을 때의 처벌을 염두에 두게 된다. 처벌이 두려워 행동을 하게 되는 셈이다. 자발적 의지는 찾아보기 어렵다. 자녀를 수동적이며 소극적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처벌하는 방식은 전통적으로 자주 사용하여 왔기 때문에 대체적으로 익숙하고 쉽게 용인되기도 한다. 그동안 우리는 처벌주의에 몸담겨 자라났기 때문에 잘못하면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벌주고 벌 받는 환경이 가정과 사회에 만연되어 있어 자신이 늘 놀던 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벌을 많이 받아 벌에 익숙해져 버리면 벌 안 받을 만큼만 하는 게 고작이다. 벌을 받느냐 안 받느냐가 최대의 초점이 되기 때문이다. 벌을 받아도 특별한 감흥이 생기지 않는다. 일상의 일처럼 느껴질 뿐이다. 오히려 벌 받지 않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단체생활 하는 집단에서 매일 밤 긴장감이 풀리지 않게 하려고 취침 전 전체 집단원에게 얼차려를 시켜왔다. 잠자기 전 얼차려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과가 되었다. 한 번은 얼차려 없이 취침을 시켰더니, 모두 눈은 감고 있는데 한 사람도 자는 사람이 없었다. 일상에서 벗어난 상황이 오히려 긴장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예의 얼차려가 주어졌고 취침이 허락되었을 때 금방 코 고는 소리가 온 방을 흔들었다. 

벌 받기에 익숙한 사람들이 받아야 할 벌을 받지 않으면 불안해서 잠도 오지 않는다. 받아야 할 벌을 받고 나면 벌은 받았지만 다음 벌 받을 때까지 마음은 평화롭다. “까짓것, 받게 되면 또 받지 뭐”라 생각하게 되고 잠도 잘 온다. 벌 받는 데 이골이 나면 지금까지 받은 벌로는 간에 기별도 오지 않는다. 벌을 겁내지 않게 된다. 좀 더 큰 벌을 받을 필요가 생긴다. 그동안 벌을 받아야 동기화가 되어왔기 때문이다. 이미 벌을 받아야 행동에 시동이 걸리는 시스템이 구축된 것이다. 

자식들을 때리고 벌 줘야 말을 듣는다고 신봉하는 부모가 있다면, 정작 자녀가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 놓은 장본인이 바로 부모 자신이라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이런 부모들은 자신의 어릴 적 모습이 지금 자녀들의 모습과 꼭 닮았다는 것을 알아차리기 어렵다. 

처벌주의 양육이 가지는 가장 무시무시한 부작용이 바로 여기 있다. 자녀들이 자신은 벌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며 때로는 벌을 주어야 하는 사람이라고 무의식 속에 깊이 간직하게 된다. 자신의 모든 관계에서 이것을 실현하며 평생을 살게 되는 것이다. 가정폭력의 대물림이 일어나는 이치다. 학교폭력이 근절되지 않는 이유다.

반면 어떤 행동을 하도록 할 때, 성취와 수행에 대한 칭찬을 하고 상을 주며 인정해주는 장려주의의 정신적 맥락은 처벌주의와 꼭 같다. 칭찬과 상 받는 일에 익숙해지면 칭찬과 상 받는 일을 아주 쉽게 잘 하게 된다. 귀염을 많이 받고 자라난 아동이 어디서나 귀염 받을 줄 아는 것과 마찬가지다. 벌과 비난은 긴장과 죄책감으로 불행한 느낌을 불러온다. 상과 칭찬은 이완의 편안함과 만족감으로 자긍심을 키워준다. 

자녀를 키우는 데 있어 벌과 비난에 푹 절이는 처벌주의를 선택할 것인가, 상과 칭찬에 절게 하는 장려주의를 선택할 것인가. 부모가 결정해야 한다. 잘할 때는 칭찬하고 잘못할 때는 벌을 주는 기회주의는 벌을 더욱 인상적으로 만들게 된다. 일관된 장려주의가 자녀를 성공과 행복으로 이끈다. 자녀의 팔자가 이런 식으로도 결정되는 것이다.
 
 
김영호 <사>한국가족상담협회 대구가족상담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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