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토요단상] 바쁜 맛보기2019-08-02 09:25:24
작성자


매년 6월이 지나가려 할 때면 드는 생각이 올해도 든다. “벌써 일년의 반이 지나가고 있다. 불과 얼마 전 설에 고향 다녀왔고 엊그제 벚꽃 폈는데….” 정신없이 살다보니 세월 가는 줄 몰랐다. 항상 이런 식으로 살아왔다. 올해만이 아니다. 매년 반복된다. 그런데도 개선이 없다면 끈질긴 습관에 빠져 있는 것이 틀림없다. 별로 한 것 없이 몇 십 년도 후딱 지나갔다. 학교 졸업하고 결혼하고 아이 낳고 기르고 한 일들이 벌써 까마득하게 옛일이 되어버렸다. 그동안 있었던 잡다한 일들을 건너뛰어 나는 지금 덩그러니 놓여 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한 것이 없지는 않다. 많은 일이 있었지만 생각이 잘 안 난다. 심지어 연초에 한 단단한 결심과 결행 계획까지도 흐릿하다. 잔잔한 회한이 밀려온다. 언제는 안 그랬나 하고 생각하니 작은 한숨이 나온다.

그렇다. 정신없이 살아서 그랬다. 지금까지 살아온 모습이 정신없이 살아온 것이다. 상황과 일거리는 계속 일어난다. 한 가지 일거리를 처리하다가 보면 채 끝나기도 전에 또 다른 상황이 터진다. 심지어 겹쳐서 발생하기도 한다. 산다는 게 상황 처리하기에 바쁘다. 코앞으로 느닷없이 다가오는 상황을 처리하는 데 급급하다보면 상황 처리에 정신이 팔려서 정신없이 살게 되는 것이리라. 내가 매일매일 밀려서 사는구나! 내가 열심히 사는 줄 알았는데. 일거리에 밀리고 세월에 떠밀리고 상황에 눌려서 내 인생의 콘텐츠를 챙기지 못했다. 세월의 강물 속에 귀중한 내 시간들을 떠내려 보내는 식으로 살아오다니!

이제부터는 정신 차리고 사는 것이다. 정신을 차린다고 바쁜 일이 생기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최소한 내가 바쁜 줄 알면서 바쁜 것과 그저 바빠서 정신없는 것과는 삶의 모양새가 다르다. 시간을 잃고, 시간의 내용을 잃고, 생활의 업적을 잃고서야 어찌 내가 살았다고 하겠는가. 그냥 살려진 것뿐이지.

내가 산다는 의미를 충실히 챙기기 위하여 바쁜 중에서도 바쁜 맛을 보기로 했다. “음, 이것이 바쁜 기분이고 바쁜 맛이로구나!” 그러고 나니 내가 무엇을 어떻게 왜 하고 있는지가 보인다. 나의 인생이 챙겨지는 느낌이 온다. 삶의 기억이 정신없을 때보다 훨씬 선명하게 남는다. 산 것 같다. 가족이나 다른 사람 보고 정신 차리라고 해왔는데, 정작 내 자신은 하도 정신없이 살아와서 숙달되어 정신없이 지내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이제 새삼 깨닫는다. 정신없이 살았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있도록 살아야겠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동안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 여럿 보인다. 집사람이 나에게 무슨 의미를 가졌는지, 자식마다 내가 부여한 의미가 같지 않았다는 것도 느껴진다. 다섯 손가락을 깨물었을 때 모두 똑같이 아프지 않다는 것도 알겠다. 어떤 자식을 은근히 더 챙겨왔던 이 아버지가 나머지 자식들에게 미안하다. 옹졸한 아빠였다. 지금까지 가정을 희생해 가면서 내 집의 일보다도 더 우선적으로 여겼던 나의 직무도 나이 들어서 보니까, 정신 들어서 보니까 또 다른 모습들이 짚어진다. 모두 내 가족과 같이 잘살려고 한 일인데, 정작 가족은 어디 가고 없고 나 혼자 끊임없이 밀려오는 일감과 그 중압감과 아련한 시간의 기억으로만 남아 왔다. 이렇게 계속 정신없이 산다면 죽는 것도 정신없이 혼자서 죽을 것 같다. 허망하게도.

정신 차린 눈에 아내가 보인다. 나와 같이 정신없이 살았으리라. 그 곱던 손등이 쭈그렁 뻣뻣해진 줄도 모르고 하찮아 보이는 일들에 오늘도 바쁘다. 내 가까이 있는 또 다른 나처럼 느껴지는 여보! 오늘 저녁 식탁은 내가 바쁘지 않은 맛으로 한번 차려 볼 게요. 정신 차리고 함께 맛을 봅시다, 그려.
김영호 <사>한국가족상담협회 대구가족상담센터 소장



27일부터 ‘토요단상’의 새 필진으로 김영호 <사>한국가족상담협회 대구가족상담센터 소장이 참여합니다. 김 소장은 서울대를 나와 대구대 대학원에서 문학 석사, 부산대 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한국복지상담학회장을 지냈으며 현재 한국가족복지연구소 대구가족상담센터 소장, 대구시 노인학대방지센터 판정위원 등으로 활동 중입니다. 

[Copyrights ⓒ 영남일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자동등록방지 숫자를 입력해 주세요)